타작마당

왕국회관에 구속된 친구에게
가이오 2008-05-08 오후 4:37
목사님!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겉사람은 후패하여지고 속사람이 날로 날로 새로워 지는 목사님의 신앙을 통하여 영생에 대하여 성령께서 많은것을 생각하게 하는군요

우연히 인터넷글 에서 보고 글 올림니다. 참빛선교회 형제 자매들에게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진짜 오랜만에 만났었어. 그치?

따져보니까 17년째 우리의 만남이 지속되고 있고(나에게는 좀 드문 관계다), 이번처럼 2년 만에 만났어도 똑같은 느낌 때문에 아주 편안하고 좋았어. 못 만나는 동안 너의 변화된 모습에 조금은 놀라워했지만.


지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실용적이고, 무엇보다도 주관과 소신이 뚜렷하고 무엇하나 부족한 것 없이 자신의 의지로 인생의 당면한 문제들을 풀어가는 동시에, 강원도 봉평에서 태어날 만큼 소박한 휴머니스트인 네가(아부가 너무 심했나~^^ ?) 어찌 <여호와 하나님>을 떠올리게 되었는지 그것이 참 흥미진진했어. 네 자신도 그런 표현을 한 것 같다만.

이렇게 편지 쓸 생각은 없었는데, 너와의 만남 후에 그날 밤부터 잠을 푹 잘 수 없었어. 네 생각이 계속 나서... 자다 깨면 생각나고, 그러다가 계속 잠은 안 오고 해주고 싶은 하나님 말씀들이 머리 속에 빙빙 돌고 그러다가 날이 밝아오고...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때그때 메모해두었었는데, 일주일 이상 가지고 있다가 이렇게 글로 옮기게 되었다.


헤어질 때 너가 건네준 ‘파수대’ ‘깨어라’ 잡지(당시 유대 사회에서 모든 학문에 박식하고 율법으로도 흠이 없으며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고전2:20)”고 고백했지. 이 말씀 앞에 동일하게 ‘예’로 화답된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 외에는 모든 것을 ‘잡지’로 부르는 습관 때문에 이렇게 ‘잡지’라고 부른다)를 그날 밤 바로 읽었다.

앞에 써있는 목차를 읽으면서 무엇을 말할 것인지 한 눈에 들어왔지. 그러면서 내가 너에게

“도덕적인 인간의 행위를 하나님 앞에서 가치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 뿐 만 아니라, 더 고상하고 괜찮은 인격체로 다듬어 나가고자 하는 것은 성경의 내용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만을 믿는다는 개신교단의 어디에서도 다 가르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교회가 아니래도 왕국회관이 아니래도 세상 어떤 종교, 아니 아무것도 안 믿는다는 사람들에게서조차도 쉽게 가르쳐지고 들을 수 있는 말들이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 무엇하러 또 괜찮은 인격자가 되라고, 그것 잘하면 기뻐한다고 그러겠냐... 그런 것을 가르치는 것은 네 말대로 필요하다. 사회의 질서를 위해서... 그러나 그냥 가르쳐야지, 그러한 행위들을 점점 잘할수록 하나님이 더 기뻐한다면서 성경의 하나님을 끌어오면 안 되는 것이다... ” 등등 떠들어댔었지.

<<왜냐하면 사람들이 찾는 하나님과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야. 사람들이 찾는 하나님은 여러형태로 뻗쳐있는 자신의 소원(건강, 명예, 형통, 쓸 만큼의 돈, 봉사자, 온유한 자, 친절한 자, 사랑많은 자, 지식습득, 기능습득, 구원소망 등등)을 만족시켜 주시는 하나님이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자신의 입으로 내신 맹세(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만을 이루시는 쪽으로만 일하시는 분이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복 받기 위해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려고 노력하고, 시간 바쳐 돈 바쳐 몸 바쳐 자기 한 몸 죽이면서 헌신하고자 애쓰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반대로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의 하나님은 무조건 덮쳐오는 형태로 나타나.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만 움직이시기 때문이지. 열매를 내는데, 언약의 하나님이 계시하신 그 한 분만을 가리키는 열매를 내는 거야(마 7:15-20). 그러니까 전자는, 하나님을 만나고 복을 받기 위해서 자기가 생각한 각본대로 (열매라고 확신하는 어떤것들) 열심히 행하는 것이고, 후자는 조건 없이 찾아오신 언약의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소유당하면서(자신의 모든 걸 빼앗긴 채) 그 분이 내시는 열매들을 순간순간 맛보는 것이다. 이미 천국의 맛을 보는 거지. 또한 전자는 능력자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이 땅에서 자신의 소유가 점점 더 늘어나고 보기 좋은 형태로 쌓여가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따라서 그렇게 된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증거 하려 해. 후자는 받은 열매를 보면서 자기에게 주신 그 분만이 모든 것을 다 이루셨으니, 겉으로 보이는 인간의 어떤 상황이나 행동에 관계없이 언약의 하나님이 지시하신 그 한 분 만(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을 증거하는 쪽으로 나타나게 되는 거야.>>


그때 네가 그랬어. “우리도 전도라든가 그런 행위가 핵심은 아니야...”라고 말이지. 그런데 내가 이 책들을 보니, 전부다 그런 내용들뿐이구나? <희망이 필요한 이유, 어디에서 진정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백성은 친절해야 한다, 사랑해야 한다, 성서의 도움으로 유혹을 물리치라, 모세-그의 삶이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 나쁜 습관을 극복하는 것은 가능한가, 청소년-나이트클럽에 가는 것은 어떠한가...> 그 외에 우리의 실생활에 유익하게 써먹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과학정보, 유용하고 똑똑하게 만드는 지식들... 이 전부였지.


그러니까 독자란을 읽어보면,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알고 율법을 잘 지키고 있었던 유대인들까지도 모두 다 죄인이라고 심판했던, 그러면서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건져내시려고 그 죄를 대신 담당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고마움은 하나도 안 보이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대신에 자신들에게 ~을 일러주어서 고마웠다, 일련의 기사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교수인 나도 몰랐던 것을 여러분은 간단명료하게 제시하는 능력이 있어서 참 감탄했다, 친절한 여호와 증인의 이야기 덕분에 당뇨병에 대해서 미리 알고 대처하게 되었다, 지렁이에 대한 경탄할만한 기사를 읽고 지렁이의 가치에 대해서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등등 인간이 해놓은 일에 대한 경탄이 글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어. 성경의 인물을 탐구하면서도 ~~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 있어서 대단한 결단력과 열정과 정성이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이래야 한다... 면서 인간중심으로, 문자 중심으로 써놓은 글들뿐이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고 하나님의 오른 손으로 들려 올려져서 모든 입으로 <주>라 시인하게 만드신 그 예수님을 알고 난 후 나의 사고방식은 ‘내 자신이 지렁이만도 못한 존재’인 것을 알아가고 있는 것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단지 용서받고 살아가면서, 예수님의 주 되심만을 증거하게 됨을 기뻐하게 되었거든. 나는 예수 알기 전이나 후나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데, 성령께서 불뚝불뚝 그 분 마음대로 그 분의 열매를 내신다는 것도 알았고. 그러니 위와 같이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겠니. 재미는 있어. 그리고 분명 훌륭한 잡지야. 그림도 좋고. 꼭 예수 처음 믿을 때 감동적으로 보았던 ‘리더스 다이제스트(세계인의 기독잡지)’ 같다. 그러나 이러한 아름다운 지식과 정보라도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되어있는 걸 어쩌겠니(고전 2:1,2)?


내가 너에게 오늘날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여호와 증인’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이나, 잘못된 개신교단의 가르침들과 비교할 때 그 차이점이 뭐겠느냐고 물었지. 얼른 보면 비슷하잖아. 인간의 행위로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애쓰는 모습들은 똑같고. 네가 대답했지. 개신교는 삼위일체를 믿고 너희는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왕국을 믿는다고. 나는 삼위일체를 믿는 게 아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했지. 삼위일체는 교리일 뿐이야. 그래서 교리 믿으면 지옥 가고, 성경대로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거든(요 17:3). 교리는 인간 자신들이 속한 조직을 결속시켜 나가고 하나 되게 만들려는 인간이 만든 의도적인 산물이야. 그러니까 교리를 붙잡고 있으면 인간을 붙잡고 있는 것이지. 죄인이 죄인에게서 나오는 것을 붙잡고 있으면 아무리 유익한 것으로 그럴듯해 보여도 그 마지막은 저주라고 되어 있잖아.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갈 1:8)


그 밑에 10절을 보면 ‘사람에게 좋게 하고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는 것’이 <다른 복음>인 것을 알 수 있지. 인간의 지상낙원에 대한 희망을 주고, 인간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일러주고, 양심에 거리낌 없는 도덕적인 삶으로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온갖 제스춰들은 많은 사람들을 좋게 하는 일이고 기쁨을 주는 일이야. <영생>조차도 여호와를 믿고 예수를 믿어줘서 ‘내가’ 취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한 사건이라고 가르치지. 그러니까 설사 믿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렇게 가르치는 자를 미워하지는 않아. 인간의 가능성을 인정해주고 더 잘할 수 있다는 존재로 박수 쳐주는데 그게 왜 기분 나쁘겠어. 물론 자신을 너무 귀찮게 하면 미워하지. 그러나 이것은 십자가 지신 예수 때문에 미워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이거든.


그러나 성경대로 (갈라디아서 3:22.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인간의 모든 행위를 죄 아래 가두고(부인하고) 오직 모든 언약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만 <주>로 높일 때, 택한 백성이 아니고는 기분나빠하게 되어있어.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 되고자 하는 ‘악’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야. 아니, 자신이 최대한 노력하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확신해.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이다(요 1:1)’ 하면서 그 분이 하신 일만 내세우고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토해내면 기분 나쁜 거야. ‘내가 왜 배설물이야. 하나님이 나를 자녀로 삼으셨는데...’하고 말이지. 자신의 구원이 중심이기 때문이지.


하나님이 약속하신 기쁨의 아들은 오직 예수 한 분이다. 바로 그 아들을 드러내고 높이시려고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고, 선택된 하나님의 자녀들을 도구로 쓰시고 있을 뿐이야. 그러니까 성경은 인간 구원에 관한 증거가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내신 맹세(언약)가 아들 예수를 통해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드러나는가(계시)-가 중심이지. 그래서 <성경은 내게(예수)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는 거야. 그러니까 성령 받고 예수를 <주>로 알게 된 사람은 주어진 환경 가운데서 자연스럽게(성령께서 기회주실 때) 예수만이 믿음의 실체라고 증거할 뿐이야 그러니까 무엇에 매일 필요가 없는 것이지. 그러니까 인간구원이 중심인 사람은 어떻게 해서라도, 한 명이라도 교회 다니게 하려고 온갖 정성을 드리고 싶어 하고 (‘교회’는 곧 ‘구원’으로 아니까), 한 명이라도 여호와 증인을 만들고 싶어서(그게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그리스도인은 도덕적이어야 하고 감동을 주어야 하고 어떻게 어떻게 살아야 되고... 가 계속 따라붙게 되는 것이지. 믿음은 <끝>을 보여주시는 건데, 위와 같은 종교성은 이 세상 죽는 날까지 계속해서 나머지가 붙게 돼. 끝이 안 난 게임은 근본적으로 피곤하지. 그리고 그게 곧 이 세상의 모습이고.


예수님이 만약에 인간의 가능성들을 인정해주시면서 천국을 선포하고 다니셨다면, 그 당시 성경을 잘 알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로 내몰리지는 않았을 거다. 그러나 오히려 그 반대로 하나님에게서 나온 나를 몰라보는 너희는 마귀의 자식이다, 회칠한 무덤이다, 독사새끼들이다... 하면서 저주받은 죄인으로, 그들의 지금까지의 행위를 다 부정하고 다니셨거든. 그들의 율법적인 행위와 완전히 반대되는 일들을 하시면서 (내가 성전이다, 내가 하나님이다,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나를 믿으라...)약속의 성취자로 오셨음을 자기백성에게 드러내고 다니신 거야. 오늘날도 이렇게 복음이 선포될 때, 믿음을 선물로 받은 은혜의 사람들과, 무언가를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두 세계가 화끈하게 갈라짐을 볼 수 있어. 지옥 갈 사람이 지옥 가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마음아파 하시지 않거든. 이미 창세 전에 끝난 이야기니까.


세리와 창기들에 관한 신약성경을 읽어본 적이 있지? 예수님이 그들과 친구처럼 대했던 것을 알 수 있어. 남을 속이면서 돈 뜯어내고, 음탕한 눈을 흘겨야만 겨우 먹고 살 수 있는 이 부류의 사람들을 향하여, <깨어라> 잡지는 어떤 해석을 내릴까? 평생 아무런 도덕적인 일을 한 일이 없이, 강도죄로 사형당하기 직전에 있었던 예수님 옆의 강도에 대해서는 또 어떻고. 예수님은 그 강도에게도 낙원을 선포하셨거든. 또 예수님의 공생애동안 자신들의 <주님>이라 고백하며 계속 따라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부인하고 떠나버린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은 한결같이 다시 찾아오셔서 성령을 부어주셨거든. 그리고 자기를 증거하라고 부탁하시지(행 1:8).


그런데 그 잡지에는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부도덕한 일(음탕한 분위기에 함께 있는 것, 속임수, 정직하지 못한 것 등)을 하고 살면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잖아. 그래서 행위와 믿음을 연결시키면 예수님과 반대로 나가고 있는 것이고, 결국은 성경과는 아무 상관도 없게 되는 것이지.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부정하고 뒤집고 있어.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택한 자기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 것이라고 말씀(요 6:39)하셨거든.


앞에 나와 있는 목차들을 봐봐. 모두 그 중심이 ‘인간’을 말하고 있는 거야. 성경의 중심내용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에서 떠난,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것과 아주 비슷하지 않니? 그래서 내가 그랬지. 나는 무슨 종교, 무슨 종파... 그런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이 과연 예수의 행하심을 최고로 여기는가’에 초점이 있다고. 다른 많은 것들을 말하고 재미나게 놀고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고 자신의 일들을 자랑해도, 말씀 앞에 서면 우리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을 쓰레기로 보면서 예수님의 피 값만을 유일한 공로로 높이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그 순간에 성도인가 아닌가는 식별이 되는 거라고.

네가 ‘왕국’이라는 말을 이따금씩 인생의 궁극적인 희망이요 구원의 종착지처럼 이야기했는데, 구약에서 <왕>이라는 의미는, 선택된 이스라엘은 왕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나라라는 거야. 그 왕 ‘한 분’에게 모든 백성들의 삶과 죽음이 통째로 들어있다는 의미지. 구체적으로 다윗이라는 왕이 등장하고 있어. 그러나 인간 다윗은 실패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언약완성자인 아들을 향하여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음을 그 뒤에도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어. 이것들은 율법(말씀을 실천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근거. 계명)을 이룰 수 없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주는 동시에, 하나님 자신이 계시하신 말씀을 스스로 완성시키고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이지.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 3:23-25)


성경에서는 이와 같이 <왕>으로 오신 <예수>를 <믿음>의 실체로 나타내고 있지. 그래서 <믿음>은 <예수>라는 거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속성인 거룩함, 의롭다 함을 단번에 얻게 되는 것이지. 그래서 더 이상 우리는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음을 알게 되고. 그래서 행위로가 아니야. 행위로 하면 은혜가 가려지거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가려지거든. 그리고 하나님이 제시하는 거룩함에 이르기 전에 다 죽고 말지. 아니, 이미 죄와 허물로 죽은 자(엡 2:1)이기 때문에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거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망의 몸에서 무엇이 나오겠어. 그래서 선택된 자기백성에게 은혜로 거저 주시는 것이지. 선물로 말이야. 그러면서 ‘이것이 누구 때문인지 아느냐, 내 기뻐하는 아들 예수로 말미암은 죄사함의 공로로 주어진 것이다’를 알게 해. 십자가 지신 아들을 내세우시는 거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이 십자가의 은혜만 자랑하고 나타내게 되어있음을 알 수 있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7)”


그러니까 진짜 <왕>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고, 왕국은 다른 나라가 아니라, 곧 <예수님 나라>임을 알 수 있지. 그 분이 <주>가 되신 거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를 따르는 무리가 소리 질러 외쳤다고 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 21:9)” 골로새서 1장에서는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기록되어 있지. 아들의 나라는 아들이 주인이야. 여호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고 되어 있어(마28:18).


예수님이 오신 이후의 신약성경은 어디를 보든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하고 있지. 사도행전 같은 복음서는 사도들이 핍박을 받는 이유가 여호와를 증거해서가 아니고, 예수 이름으로 가르치고 그 이름이 그리스도라 전도하기 때문임을 보여주고 있다. (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4:12,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21,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4:18,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5:41,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5:4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하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9:22,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9:29... ) 이 외에도 일일이 셀 수 없이 많아. 한마디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고 가르친다는 이유로 순교 당한 것이거든.


네가 예수를 인정한다고 하면서, 그러나 그보다 큰 자가 그의 아버지 ‘여호와’라 토를 달았어. 한번 생각해보자. 아버지가 종들에게 “너희는 내 아들 말만 들어라, 내 아들을 너희의 주인으로 세웠다. 내 아들을 만나야 나를 만나는 것이다. 다른 높은 곳에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아들 안에 내가 있다(고후 5:19-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라면서 부탁하셨어. 그런데 종들이 이 말에 기분이 나쁜 거야. 그래서 “내가 왜 저 별 볼일 없는 아들 말을 들어야 됩니까. 나는 더 크고 높으신 여호와 하나님, 당신 말만 듣겠습니다” 그렇게 고집한다고 생각해보라고. 그렇게 원망하고 고집을 피워도, 선택된 자녀이면 끝까지 이 진리를 알게 애쓰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하심이 계속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아들 안에서 함께 거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만 확인될 거야.


택함 받은 자녀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가리워주시기 위해서 어린양의 피로 제물이 되신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야. 부활하여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셨고, 그 예수의 영을 받은 자마다 예수의 <주 되심>을 알게 되는 것이지.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되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심(롬 8:16)”을 믿게 돼. 그러니까 내가 전도를 하고 있는 것도 그 분의 영이 친히 하고 있는 것이니, 자기 체험이나 경험을 내세우지 않게 돼. 아니 내세우는 것처럼 보일 때, 자신은 금방 ‘아, 내가 또 예수를 수단 삼아서 내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서 안달이구나...’를 깨닫지. 그러니 또다시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내세우기를 원하는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이 죄를 용서받으며 살고 있음은 순전히 은혜구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거야. (그러니까 율법은 행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지. 롬7:7-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그리고 계속해서 예수가 <주>임을 믿고 증거하게 되고 그 자체가 또 성령의 인도임을 알게 되고...... 그러니 내 남편, 내 자녀, 내 가정, 내 나라, 내가 속한 이 세계... 의 어떤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근본적으로 즐거워한다거나 크게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사람들(요 13:1)을 끝까지 죄 용서하심으로 영생에 이르도록 이끄시는 <예수 그 이름>으로 인하여만 감격하게 되고 참 기쁨을 얻게 돼.


그러니까 예수를 알고 믿게 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상황이나 인간 됨됨이가 (사람들 보기에 좋은 쪽으로) 크게 달라진다고는 볼 수 없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아. 화내고 거짓말 하고, 속이고 낙심하고, 자기의 기쁨을 위해서 달려가고, 죽을 병에 걸리고, 쇠하여 가고, 실수하고, 비참해질 때도 많고 ... 그의 결국은 죽음이고... 그러나 다른 것이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만>을 믿는 믿음 안에서 떨어지지 않고 그 분 만을 <주님>이라 부르는 걸 보니, 끊임없이 용서받고 있다는 것을 점점 더 크게 크게 알아가게 된다는 거야.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8)”


그러니까 죄는 여전히 있지만(그리고 어떤 것으로도 그 죄를 없애지 못하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이기에(롬 3:24) 그 죄를 가리우심 받은 복 있는 자가 된 것이지. 아예 죄에 대한 생각 자체가 근원적으로 뒤집어 지는 거야. 죄란 뭘 잘하고 잘못하는 내 행동여하에 따라서 죄가 되고 안되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 내가 책임지겠다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죄라는 것이고, 어린아이처럼 한없이 받아 누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로 말미암은 용서, 사랑이 바로 우리의 의(거룩)인 것이지.


네가 준 잡지들에 있는, 또는 여러 기독 잡지들에 있는 것과 같은 그런 땅에서의 복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3-5)을 말하는 거야. 그 복을 받은 사람은 안개같이 지나가는 이 땅의 것들에 대해서 그다지 요동칠 필요가 없게 되지.


그런데 사실, 말씀대로 이웃 사랑도 많이 할 때가 있고, 전도(그리스도에 대한 비밀을 말하는 것-골 4:3)도 하게 될 때가 때때로 있고, 또 화 안낼 때도 많고 친절하고 온유할 때도 많이 있어. 이 때 ‘성도’라면,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이 정도로 사랑이 많아지고 성품과 인격이 괜찮아지고 있구나...’하면서 뿌듯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째 나 같은 죄인의 몸에서 이 열매가 터지고 있을까, 역시 성령의 열매(갈 5:22,23)는 놀랍구나’ 하면서 예수님의 일하심에 또 주목하게 된다는 것이지. 몸의 컨디션에 따라서 변덕이 죽끓듯이 하는 이 죄인의 몸에 주목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야.


내가 참 말이 많았다. 사실 말로 하면 얼마 안되는 분량인데, 글로 쓰니 이렇게 잡다하게 늘어지게 되었구나. 이것도 다 내 욕심이야. 인간의 욕심까지도 그 분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인다는 것은 알지만. 더 욕심을 내자면, 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성경에 있는 하나님을 믿고 성경 말씀에 관심이 있다면, 성경의 증거대로 새언약의 실체로 오신 예수에 대해서 깊이 있게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것이야. 그래서 측량할 수 없는 그 은혜의 길이와 높이와 넓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는 역사가 우리에게 동일하게 일어나기를 소원하게 되는구나.


새언약은 옛 것이 아니고 새 것이며, 문자가 아니고 영이라고 하시거든. 문자(의문)는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며 (고후 3:6), 옛 것은 그림자이고 모형이며 장차 올 새 것을 가르키기 위해서 있는 거라고 해. 문자는 돌에 새긴 모세언약 때의 율법을 말하지. 육신으로 행해야 되는 법. 반대로 영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를 말해. 성령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만 있어. 그리고 이것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그의 자녀들을 해방시킨 것이고(롬 8:2). 해방 당한 자는 한 일이 없어. 그냥 일방적으로 택하심을 따라 되는 은혜로 알게 되는 것이지(롬 9:11). 죄와 사망의 법은 뭐냐면, 그 위 7장 마지막에 잘 나와 있어.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곤고한 죄와 사망의 법... 그러니까 7장 전반부에 걸쳐 쓰여 있는 대로, 율법대로 말씀대로 지켜서 생명에 이르게 할 것으로 알았던 그 계명이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인 줄을 알았다는 거야. 즉 우리가 무슨 선한 일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되는 줄 아는 지식이 곧 사망의 법이라는 말씀이지. 나도 너도 그 누구도 이 사망의 법에서 한 발자국도 스스로 헤어날 수 없다는 거야. 살면 살수록 그것을 더욱 확인하게 돼. 예수만 믿는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행하지 않으면 도대체가 살 수가 없다니까! 그냥 이 사망의 몸이 알아서 이미 내 몸에 좋은 대로 행하고 있어. 이런~!


이것이 하나님 앞에 선 자의 진짜 고통이고 절망이라는 것이지. 그래서 어떤 복음 전도자는 기가 막힌 진리의 한 토막을 말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만, 십자가 지신 예수님 앞에서만 진정으로 절망하게 된다. 절망의 동기는 십자가다!> 캬아~! 이렇게 가슴 저미면서도 후련할 수가--- 그러니까 이 절망을 맛 본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인고! 하늘에서 찾아오신 자의 사랑을 받았다는 뜻이니까. 죄를 알았다는 것이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았다는 것이니까. 끝도 없이 책임져야 할 나머지 딸린 짐 덩어리의 깊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니까. 진리가 주는 자유를 알았으니까......


그러므로 7:25처럼 예수의 영, 성령을 받고 보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고, 8:1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육신의 생각과 행위에 대하여 죄를 정하는 것: 내가 왜 이렇게 행동했지? 더 기도해야지, 더 최선을 다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등등 양심의 죄를 정하여 받는 것)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 마귀는 끊임없이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선 악간에 판단을 시도하게 하거든. 그러나 성도는 정죄함이 없는, 진리가 주는 이 자유함으로 끝까지 가게 됨을 고마워하게 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내 육체에 채워지는 사건(골 1:24)을 당연시하며 살아가게 되고 말이야.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1:12)

댓글 1개
마당쇠 2008-05-08 오후 8:40
가이오형제님, 고맙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3-25) 아멘,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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