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복음

나의 나 되는 것은 내가 아니요
2004-01-21 오전 11:58
이방의 빛으로 이방에 보내심을 받은 사도 바울은 옛 사람 사울을 온전히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어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그에게 이루어진 사실을 밝히 증거하십니다.

증거하시기를『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9-10) 하셨습니다.

내가 평생에 바울을 사모하며 그를 따르는 것은 바울이 그리스도로 본을 삼은 것 같이 나도 바울로 본을 삼으려 함입니다. 이는 바울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본을 삼으신 예표의 사람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록되기를『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 하셨습니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기에 합당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사도로 세우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증거하시기를『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딤전 2:5-7) 하심같이 그를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스승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증거하시기를『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하셨습니다.

우리 곧 이방인의 스승이 되신 사도 바울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확실하게 옛 사람을 벗어 버렸습니다. 기록되기를『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갈 1:16) 라고 증거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를 내 속에서 나타내시려면 내가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는 결코 나타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의 복음은 결코 혈육과 의논될 수 없습니다. 만일 혈육과 의논된 복음이면 이 복음은 곧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바울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을 따라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이는 이방에 복음을 전하게 되는 시발점이 바로 다메섹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을 확실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먼저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결코 따를 수 없는 십자가의 도를 성령으로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먼저 자기 곧 혈육을 부인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기록되기를『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하심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혈육과 의논하여 말로는 하나님의 의를 세운다 하나 실상은 하나님의 의를 세우려 하지 않고 나의 의를 세우려 하다가 육체로 마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나의 나 되는 것은 내가 아니어야 하는 데도 시작할 때에 온전한 번제를 주의 단에 드리지 못하고 주와 함께 죽었다 하나 아직 내가 살아 더러운 옷을 입고 하나님의 집을 온통 더럽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록되기를『대제사장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하니님이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하나님께서 자기 앞에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하나님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하나님의 사자가 여호수아에게 증거하여 가로되 만군의 하나님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준행하며 내 율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중에 왕래케 하리라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만군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슥 3:1-10) 하심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얼마나 자기를 온전케 해 보려고 힘을 쓰셨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의의 옷은 그리스도의 의의 옷이 아니고 자기의 의의 옷이었기에 아무리 깨끗하게 해 보려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옷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자기가 있으므로 자기의 죄과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시작은 곧 자기 부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자기가 있는 사람은 말로는 자기에게서 그리스도가 살아 그리스도만 자랑한다고 하나 결국은 자기를 높이게(더럽게) 되어 나중에는 자기만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시작할 때에 자기를 온전히 부인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히 5:12) 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가르침을 받으려면 들을 귀가 있어야 합니다. 이 귀는 혈육의 귀가 아닙니다. 기록되기를『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하심같이 생명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들을 귀”입니다.

기록되기를『만군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만군의 하나님의 집 곧 전을 건축하려고 그 지대를 쌓던 날에 일어난 선지자들의 입의 말을 이때에 듣는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슥 8:9) 하신대로 교회의 터를 닦던 사도들의 입의 말을 이때에 들어야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는 하나님의 집의 산 돌들은 그 터와 연합하며 머릿돌과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새로운 산 돌들만이 하나님이 거하실 집이 되기 위하여 머릿돌과 함께 연합하여 지어질 것입니다.

이는 주께서 저를 찾으신지 50년의 세월동안에 지나오면서 오늘 또 다시 새롭게 보여주신 참 빛의 증거입니다. 모두 함께 나누고 싶어 이렇게 서툴게나마 글을 올려봅니다. 마치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나의 모습입니다.

기록되기를『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정녕히 들었노니 이르기를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렘 31:18) 하심과 같은 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미리 말씀하시기를『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8-14) 하셨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나의 나 되는 것은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며 주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아멘, 아멘. 주님 감사합니다.

작은 형제 김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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