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복음

짐승의 가죽옷을 벗는 사람들
2005-04-11 오전 11:38
태초에 에덴에서 사람은 벌거벗고 살았습니다. 기록된 바『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 2:25) 하심같이 사람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지음을 받았으나 선이 무엇이며 악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여 부끄러워 아니하였습니다.

바로 거기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습니다. 그리하시고 이르시기를『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하셨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반드시 아래서 난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게는 거쳐야 할 하나님의 예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불순종의 자녀 그대로는 영원히 함께 거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롬 9:22)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동산 중앙에 왜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셨는가에 대하여는 성경이『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20)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동산 중앙에 두어 분명히 보여 알게 하신 이 두 나무 중 생명나무는 “그의 영원하신 능력”을 분명히 보여 알게 하심이셨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그의 영원하신 신성”을 분명히 보여 알게 하심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뱀, 곧 사단의 유혹으로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였고 결국은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어 자기의 부끄러운 곳을 가리고 나무 사이에 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미리 정하신 바를 이루시기 위하여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기록된 바『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하심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지음을 받을 때부터 하나님의 선 앞에는 도저히 설 수 없는 부끄러운 진노의 자녀이었습니다. 이 부끄럽고 진노의 자녀임을 알게 하는 나무가 곧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습니다. 이러므로 기록되기를『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창 3:22) 하시고 부끄러운 인생이 영생할 수 없게 동산에서 내어 쫓아 생명나무 실과를 절대로 따 먹지 못하도록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지키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불순종의 사람에게 짐승의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고 동산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이는 들짐승이나 육축이나 사람이 여섯째 날에 다 같이 흙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짐승의 수 곧 여섯에 속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록되기를『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계 13:18)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짐승의 가죽을 입고 이성 없는 짐승 같이 욕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돼지의 가죽을 입고 돼지같이 욕심의 삶을 살고, 또 다른 사람은 개의 가죽을 입고 개와 같이 음란한 삶을, 또 다른 사람은 여우의 가죽을 입고 포도원을 허는 삶을, 또 다른 사람은 뱀의 가죽을 입고 간교한 삶을, 또 어떤 사람은 우는 사자의 가죽을 입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까지 삼키려 하는 삶을, 또 다른 사람은 늑대의 가죽 위에다 또 양의 가죽을 덧입고 자기도 속고 남도 속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짐승의 가죽을 벗는 곳이 바로 영원한 복음이 있는 곳이요 십자가 있는 곳입니다. 이 영원한 복음과 십자가는 첫 사람이 입고 있었던 짐승의 가죽옷을 벌거벗겨 부끄러움을 온전히 드러내는 곳입니다.

헌 옷을 벗고 새 옷을 입으려면 반드시 벌거벗어야합니다. 그래서 주께서 세상에서 입으셨던 옷은 다 벗으시고 벌거벗은 몸으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언되기를『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시 22:18) 라고 증거하셨고 또한『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요 19:23) 라고 그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증거되기를『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면 반드시『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 하심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러므로 거룩한 옷을 입기 위하여 짐승의 가죽을 벗어버리며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은 선진들도 증거하기를『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라고 증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짐승의 가죽을 벗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에게『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말째 김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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